2021년 8월 27일 금요일
인생 작전대로 되지 않는다.
2013년 3월 8일 금요일
나의 저질 체력.
2013년이 시작하자마자 무리를 좀 했다. 1월에는 계속 주말에도 일했고 2월에는 안 그러려고 했건만, 첫째 주 금/토/일 3일 연속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처음에는 가벼운 목감기 정도로 여기고 나의 호중구 기능을 테스트해본답시고 약도 안 먹고 버텼다. 일은 일대로 하고. –_-;;
역시 호중구가 멀쩡하지 않나 본지 설 연휴를 맞아 계속 골골대다가 결국 백기를 들고 이비인후과 신세를 일주일 넘게 졌다. 덕분에 이제는 다 나았고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가장 섬뜩한 건, 목에 무언가 느낌이 있을 때마다 혹시 종양? 뭐 요딴 걱정을 하는데, 그런 망상에 휘둘리는 거다. 물론 의사선생님이 아니라고 했다.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 능력도 많이 부족하다. 마음은 이것저것 다 하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준다. 어쩔 수 없다. 그냥 받아들여야지. 오히려 좋은 점이 있다. 원래 내 성격이 이것저것 마구 벌려놓고 수습 잘 못 하는 성격인데, 이제는 체력의 핸디캡 땜시 애시당초 (예전처럼) 막 저지르지는 않는다. 몸이 움직이기 전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나의 온 정신을 집중한다.
그렇게 잘 하면 얼마나 좋아. 에궁. ;;
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암을 대하는 나의 자세.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 암을 알게 되고 6차 항암 치료를 마친 것이 작년 이 맘때였다.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갔고, 몸도 마음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첫 항암을 할 때에는 마치 번지점프를 즐기는 심정과 같았다. 무슨 대단한 모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흥분된 상태였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항암 치료를 받았다. 큰 항암 부작용은 없었고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요추천자의 부작용으로 똑바로 서 있기만 하면 극심한 통증이 뇌에 가해진 적도 있었지만, 누워 있으면 멀쩡했으므로 바닥에 누워 낄낄거리며 여기저기 통화를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 마디로 항암 치료는 그 자체로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느끼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치료가 잘 되고 있고 완치 확률도 (암 치고는) 대단히 높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에는 복부에 종양이 가득 차 있었지만 3차 치료후 중간평가에서 거의 다 사라졌다.
완전관해(CT상으로 종양소견이 없는 상태)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몸으로 느끼는 증상은 진단 이전에도 없었으므로 그냥 하던 대로 약만 견디고 나머지 3차 치료를 더 받으면 완전관해에 도달할 것이며 추가 치료는 없을 것으로 기대했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 사진은 무서워서 보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중간 평가 이후에는 그런 두려움도 사라지고 암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살았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 신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정점은 법인 설립이었다.
법인 설립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을 당시 나는 위에서 언급한 요추천자 부작용을 두 번이나 겪었다.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으나 온라인 재택 창업이 가능했기에 컴퓨터와 전화기만으로 덜컥 법인 설립을 해버렸다. 법인이 등록되고 법원 등기국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역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허리를 옆으로 기울이고(그렇게 하면 하나도 안 아팠다) 법원까지 운전을 해서 일을 봤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길에는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어서 법원 근처에 있는 선배의 사무실에서 뻗어버렸다. 마누라가 아들을 데리고 법원까지 찾아와서야 차를 되돌려 갈 수 있었다.
일의 진행도 순조로웠다. 같이 일을 진행했던 친구들과 호흡도 좋았고 기획도 나쁘진 않았다. 5차 치료 이후 구내염으로 1주일 정도 입원하고 체력이 많이 떨어져 일의 진행 속도가 더디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일은 계속 굴러가고 있었다. 호중구 회복이 더뎌 두 번이나 치료 일정이 연기되는 일도 있었지만, 마지막 6차 치료까지 끝내고 나서는 이제 더 이상 항암 치료는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신나게 일을 했다.
당시에 두 가지 기획이 동시에 진행중이었는데, 하나는 한 기초자치단체에 제안을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총선을 바라보고 후보자 캠프에 제안을 할 기획이었다. 운이 좋게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6차 치료를 마치고 3주 정도 흐르고 최종 평가를 위해 PET-CT를 찍고 그로부터 1주일 뒤 진료 예약이 잡혀 있었다. 12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정확한 날짜는 기억하기도 싫다). 담당 교수를 만나기로 한 바로 전날 그 기초자치단체장을 만났고 교수를 만난 이후에 바로 총선 관련 기획을 도와줄 선배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음.
“치료를 더 해야겠는데. 이식이란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할 수 있겠어요?”
질문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 배려한다는 의미였겠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는데 의향을 묻다니. 완전관해에는 이르지 못 했지만 그래도 90점 짜리는 되니 희망을 갖고 치료를 하자고 했다. 병실을 나오며 가장 먼저 한 일은 만날 약속을 했던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하는 일이었다.
사실 느낌은 좋지 못 했다. 6차 치료를 마치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자꾸 뱃속이 꿀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6차 치료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기에 꿀렁거리는 배를 붙잡고 일을 했다. 이제 자유다!
아, 그런데 이건.
치료를 받는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나는 그럭저럭 약을 잘 견디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진행해왔던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있나. 어떻게든 짱구를 굴려봤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미련을 버리는 수밖에.
자기조혈모세포이식이란, 주로 혈액암의 근본적인 치료를 목적으로 미리 환자 본인의 조혈모세포를 채집해두었다가 고용량 항암 이후에 다시 조혈모세포를 주입하여 생착시키는 것이다. 조혈모세포는 면역을 담당하는 혈액 성분을 만들어내는데, 고용량 항암 이후에는 이것이 사라지고 다시 재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완전 무균실에서 항암과 이식 치료를 하게 된다. 흔히 알고 있는 골수 이식과 같은 원리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골수에서 직접 조혈모세포를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 말초 혈액에서 마치 성분 헌혈하듯이 조혈모세포만 채집하게 되었다.
12월 20일경 조혈모세포 채집을 위해 다시 입원을 했다. 아빠의 입원을 응원하기 위해서인지 우리 아들도 입에 궤양이 생겨서 같은 날 응급실에 갔다가 입원을 하게 됐다. 채집을 위해서 일단 3일간 항암 주사를 맞았는데, 이로써 완전관해(에 가까운) 상태로 유도하고 이후 매일 두 차례씩 조혈모세포 촉진제를 맞았다.
주사를 맞고 호중구 수치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보통의 경우 2000개를 넘어야 정상이고 항암치료 중에는 1000개가 치료의 기준이 된다. 호중구 수치가 500개 이하로 떨어지면 일상생활에서 매우 엄격한 면역 관리가 필요하다. 그때 당시 나의 호중구는 50개 수준. 매일 두 차례씩 촉진제를 맞았으나 오르지 않고 계속 떨어졌다. 교수 말로는 열흘은 넘게 걸릴 거라고 했다. 게다가 일반 병실에 있었으므로 나는 아예 움직이지 않고 24시간 마스크를 쓰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크리스마스도 병실에서 보냈다. 감염 우려 때문에 성탄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호중구는 계속 떨어져 40개, 30개, 20개, 급기야는 2011년의 마지막날 10개를 찍었다. 10개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숫자다. 면역력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 그런데 나는 아직 일반 병동에 있고 스스로 관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2012년 새해를 맞았다. 새해 첫날 그래도 나는 죽지를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같은 병실의 맞은 편 침대에 있던 환자가 폐렴에 걸려 중환자실에 간 것이다. 나는 멀쩡했다. 호중구 10개로 새해를 맞았지만 폐렴균은 나를 빗겨갔다. 물론 마스크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이걸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아, 죽지는 않는구나. 그때부터 서서히 수치가 오르기 시작하더니 1만개, 2만개까지 올랐다(말초혈액까지 조혈모세포가 많이 분포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까지 오르게 하려고 뽐뿌질을 한 것이다). 드디어 채집. 다행히 한 번에 끝났다.
퇴원을 하고 1주일의 여유가 있었다. 그 동안 주변 정리를 하고 이번에는 본격적인 이식 치료를 위해 설 연휴기간 직전에 다시 입원을 했다. 이번에는 완전무균실 병동. 요렇게 생겼다.
한 번 들어가면 조혈모세포가 완전히 생착될 때까지 나올 수가 없다. 또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의료진은 커튼 바깥으로 장갑 구멍에 손을 넣어 치료를 하고 맞은 편 유리창을 통해 면회객의 얼굴을 보고 인터폰으로 통화하는 것이 전부였다.
비록 무균처리한 전화기와 아이패드, 책을 갖고 들어갔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약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무균실에 들어가자마자 5일 동안 약을 맞았는데, 이 약은 지금까지 맞았던 약에 비해 6~7배 강한, 말 그대로 고용량 항암 주사약이었다. 약이 들어가면 그냥 무기력해진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그 동안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음식을 거르거나 구토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무리 구토 방지제를 맞아도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결국 하루 만에 밥을 포기하고 미음만 먹었다. 그것도 겨우겨우. 나중에는 미음조차 먹지 못했다.
5일 동안 주사를 맞고 하루 쉬고 미리 얼려놓은 나의 조혈모세포를 넣는 날. 2012년 1월 27일. 나의 새로운 생일이라는데, 내가 그냥 다시 내 걸 넣어서 그런지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냥 한 고비 넘겼구나. 이제 좀 버틸 만 해질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도 없고, 또 무언가를 할 엄두도 안 나는 상황이었다.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흘렀다. TV를 보는 것도 힘들었다. 시간 되면 먹고 싸고 기록하고 감염 관리하고 그게 전부였다. 하루에 한 번씩 마누라가 면회를 왔지만 통화를 오래 할 힘도 없었다. 그리고 마누라가 떠나면 외로웠다. 그런데, 막상 다시 만나면 힘들어서 말하기도 귀찮은 상태가 되었다. 호중구 수치는 당연히 바닥을 쳤고 나의 몸과 마음은 바닥 아래로 떨어졌다.
애꿎은 간호사만 괴롭혔다. 아, 왜 이렇게 힘이 없나요. 잠깐만 나가보면 안 돼요? 이 정도면 잘 버티고 계신 거예요. 맞는 말인 것 같다. 무균실 창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신음 소리, 구토 소리, 각종 응급 상황들. 나는 너무 고요했다. 하루에 두 번 오는 레지던트와 한 번 오는 담당 교수. 그래요. 잘 버티고 있어요. 좀만 참아봐요.
참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그래도 한 가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항문의 통증이었다. 항암제는 몸 안의 모든 점막 세포를 파괴하는데, 항문에 제대로 염증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호중구가 0에 가까우므로 스스로 치유도 안 된다. 그리고, 치료 방법도 없다. 그저 좌욕과 연고를 바르는 수밖에. 자가면역력이 없어서 거의 도움이 안 된다. 의사도 어쩔 수 없댄다. 그냥 몰핀으로 견디는 수밖에. 근데, 너무 아팠다. 너무.
그래도 시간은 흘러 2주 정도 후에 완전 무균실을 탈출하고 준 무균실로 옮겼다. 그러니 조금 살 만 했다. 항문 통증만 빼면. 거기서 1주일 정도 더 회복하고 퇴원. 퇴원이 하루라도 늦춰질까봐 마지막 밤 잠잠했던 항문 통증이 도졌지만, 몰핀을 주문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정말 긴긴 밤이었다.
밖에 나오니 무지 추웠다. 근육에 힘도 없었지만 마냥 기분은 좋았다. 병원에서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 했는데, 나와서는 바로 밥 한 공기를 먹었다. 이식 치료후 생활은 매우 제약이 많다. 집안 환경을 항상 깨끗이 관리해야 하고, 먹는 것은 모두 끓여 먹어야 한다. 식기도 매 끼니마다 끓는 물에 소독을 한다. 나보다는 마누라가 힘들었다. 외출도 당연히 제약이 있고 집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아들을 되도록 멀리 해야 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누워만 있었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이제 해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다. 퇴원 후 처음 찍은 PET-CT의 판독지에는 이렇게 찍혀 있었다:
no significant change
뭐야. 원래는 3개월마다 한 번씩 찍는 CT를 바로 한 달 뒤에 찍게 됐다. 찔끔 줄었단다. 자라지는 않았으니 암은 아니고 종양의 흔적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제는 3개월마다 한 번씩 관찰하자고 했다.
이 때부터 극심한 우울증이 시작됐다. 3월초에는 이사도 했는데, 이사한 집도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울증이 심해질수록 나는 주변과의 연락을 아예 끊었다. 그리고 잠만 잤다. 매일 정오를 넘겨 일어났고, 오후 2시에 일어나도 또 자고 싶었다. 별로 살고 싶지도 않았지만 죽을 만한 의욕도 없었다.
마누라의 도움으로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일상생활의 제약도 하나 둘 풀려갔지만, 마음의 병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 잠만 자니까 체력도 좋지 못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30분을 걸으며 세 시간은 자야 했다. 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암이 완전히 사라진 건지도 모르겠고,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왜 작년에 법인은 만들었던 건지 짜증이 났다. 매출도 없는 회사의 세금 신고도 억지로 했다. 그리고 더 우울해졌다.
맨날 잠만 잤지만, 어떤 날은 아예 잠을 못 이루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특히 병원 가기 전 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죽음 자체는 별로 두렵지 않았는데, 죽는 과정이 너무 두려웠다. 재발을 한다고 해도 타인이식을 받으면 되기 때문에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과연 이 상태로 다시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매번 사진을 찍어도 흔적은 그대로였다. 그 놈만 없어지면, 사진만 깨끗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자꾸 마음을 먹기를, 3개월 뒤에 확실해지면 뭔가를 해야겠다는 쪽으로 결정을 뒤로 미루기만 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상태로 우울증의 나락에 빠져 여덟 달을 보냈다.
우울증 탈출을 위해 생각해낸 것이 집을 옮기는 것이었다. 이사한 곳은 예전에 생활하던 곳과 너무 멀고 아파트와 마트만 있는 재미 없는 동네였기에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10월초에 다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가 시작됐다.
이사 온 동네는 아파트지만, 주변에는 재미있는 골목이 많다. 홍제천과 불광천을 따라 걷다 보면 한강이 나온다. 난 매일 걸었다. 동네를 발견하는 재미에 걷다 보니 체력도 회복이 되고 허리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울증이 회복되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증거는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자꾸 3개월 뒤로 할 일을 미루지 말고, 주어진 3개월을 재미있게 살자. 3개월마다 갱신하는 삶을 살자.
다음 갱신일은 12월 17일이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재발을 할 수도 있고 흔적조차 깨끗하게 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오늘은 그냥 오늘 하루를 산다. 그래서 다시 열심히 살고 있다. 일도 다시 시작하고. 조만간 성과가 나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 없다. 그 자체로 이미 나의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이렇게 우울증의 터널을 빠져 나오고 나니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절망적이었는데 막상 빠져 나올 때는 아주 쉽게 빠져 나왔다. 역시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동안 옆에서 인내해준 가족에게 고맙다. 또 돌아오지 않는 연락을 해주었던 지인에게 미안하다.
암을 대하는 나의 자세도 변했다. 그냥 암 자체를 잊고 무시하면서 사는 게 제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머리로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살고 있다. 재발을 한다고 해도 타인이식치료를 받으면 그만이다. 단지 시간이 좀 더 많이 걸릴 뿐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꼭 타인이식치료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저 체력을 기르는 일이다. 어떻게든 길은 있기 마련이다.
어쨌든, 다 옛날 일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2011년 11월 10일 목요일
항암은 장난이 아니야.
처음 항암치료를 기다렸을 때는 지나치게 긴장한 것이 탈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온갖 항암 부작용의 정보를 접하니, 오만 가지 부작용이 다 내게도 일어날 것처럼 걱정을 했더랬다. 덕분에 항암주사 맞기 직전에 열이 살짝 올라서 폐렴 검사 등 각종 검사를 하고 난리를 쳐서(물론 감염증은 없는 걸로 판명) 계획보다 8시간 가량 늦어져 밤늦게 주사를 맞았다.
1차 치료후 퇴원하고 나서는 손톱 옆에 생긴 작은 상처 하나를 소독하러 가정의학과에 갈 정도로 철저하게 개인 위생 관리를 했다. 나중에는 이 역시 너무 지나친 걱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냥 대충대충 살았다.
3주 사이클로 예정된 항암치료 일정을 그대로 지키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호중구 수치가 떨어져도 촉진제 주사만 이틀 연속으로 맞으면 바로 회복이 되어, 그 다음 주 치료를 하는 데 호중구 수치가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5차 항암 때까지는 그랬다.
5차 항암 이후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을 체감했다. 그래도 난 내 기분대로 몸을 움직이다가 쉽게 체력을 방전시키고 감정적으로도 절제하지 못 했다. 결국 호중구 60개(역대 최저치)를 찍은 날 혀에 큰 궤양이 생겼고, 그 덕분에 난생 처음 무균실이라는 곳도 구경해 보았다.
퇴원하고 나서도 다음 치료 일정 수행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예정보다 겨우 이틀 미뤄졌을 뿐이고, 월요일 퇴원할 때 호중구 수치가 매우 충분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 걸. 호중구 500개.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는 숫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적잖이 당황했다. 이번이 마지막 치료였기 때문에. 얼른 피날레를 맞이하고 싶은 조바심도 있었고.
뭐, 당황스러운 감정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뿐히 날려 보냈다.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게지. 마지막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집에 와서 한숨 자고 나니 기운도 났다. 어차피 겨우 6일 늦춰지는 것이다. 그냥 다음 주 월요일까지 마음 편히 쉬는 수밖에.
머리를 비우고, 항암제 앞에 겸손해지는 나날을 보내야지.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관음증.
나는 완전 관음증 환자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덕목이 있다:
“절대 걸리지 말 것.”
이게 자신 없으면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일종의 윤리의식인데, 당하는 사람 기분은 얼마나 엿 같겠나. 우리 마누라도 비슷한 얘기를 해줬다:
“바람 필 때 피더라도, 절대 내 앞에서 걸리지 마라.”
그럴 자신이 없으면 그냥 하지 말아야 한다.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혼자 즐겨라. 그것은 개인의 온전한 자유니까. 또한, 이는 개인의 사고 중 가장 은밀한 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 인권적 측면에서도 옳다.
당신의 행동은 참 잘 못 되었다. 무엇보다 말기 암환자를 갖고 장난 쳤다는 점에서, 천벌을 피하기는 해도 속으로 쪼께 찜찜할 것이다. 나는 요즘 대충 곧 죽는다는 생각을 갖고 산다. 별로 무서울 게 없다. 어차피 금방 저 세상 가는데 뭘. 요딴 생각을 가지고 사니 아주 머리속이 심플해지고 기분도 상콤하다.
그러니까.
똑바로 좀 살아봐.
(난 얼마나 살고 싶은데, 힝. 너는 그 아까운 시간에 그거 하고 앉았냐. 한심한 놈.)
2011년 9월 5일 월요일
암 팔기.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수많은 종류의 상품 중에서 M―C―M'의 마법을 부리는(?) 상품인 임금노동자의 ‘노동력’에 대해 서술한다. 이렇게 단순히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한 마디로 자기 몸뚱아리를 파는 거다.
내가 암환자로서 스스로 위축되는 때는 내 몸뚱아리를 팔 수 없다는 자각을 할 때이다. 특히 새벽마다 예전과는 달리 풀이 죽어 있는 내 동생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흔히 하는 말로 “가진 건 불알 두 쪽밖에 없었던 시절…”로 시작되는 수많은 자수성가 스토리는 내게 오히려 자괴감을 줄 뿐이다:
“뭐여, 이건 어따 팔 수도 없잖어.”
하지만 변강쇠는 팔 수 없지만 나만 팔 수 있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암이다. 물론 돈 받고 파는 것은 아니고, 결국 따지고 보면 내게 시간적/경제적 가끔 금전적(?) 이득을 안겨다 준다는 점에서 ‘판다’고 표현하려고 한다. 그 방법의 기본은 상대방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스스로 처량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나는 퇴원하고 처음 암을 팔아본 순간부터 그 재미를 느꼈고 이제는 ‘암 걸린 것도 억울한데 암이라도 열심히 팔아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다. 여기서는 그 첫경험과 최근 경험만 소개하고자 한다.
입원 당시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얼굴이 붓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안경테가 좀 휘었다. 퇴원하고 다음날 바로 예전에 안경을 맞췄던 안경점을 찾았다. 사장님과 직원 모두 친절한 곳이었고, 종종 들러서 소소한 얘기를 나눈 터라 서로 얼굴은 기억하고 있는 사이였다.
서로 기억하고 있는 모습에서 변한 것은, 나의 하늘색 마스크뿐이었다. 퇴원하고 감염예방에 특별히 신경을 쏟아야 하는 나는, 이왕 찾은 김에 안경 닦는 수건을 두 장 달라고 부탁하였다. 평소 친절했던 직원은 다소 쌀쌀 맞게,
“그건 공장에서 들어오는 물건이 많지 않아 한 장씩밖에 못 드려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때 나는 머리를 한 움큼 쑥 뽑으며,
“저 암환잔데요.”
“헉!”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손가락 셋을 펴 보이며,
“세 장 주세요.”
“아, 네.”
이게 나의 첫경험이다. 머리 뽑는 스킬은 그 다음날 삭발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암을 팔아보니 나름 쏠쏠한 재미가 있고 그 방법도 무궁무진했다. ^^;
가장 최근 경험은 지난 토요일의 경험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웃기는 상황이고 참 내가 많이 뻔뻔해졌구나,라고 느꼈던 일이다. 내 차는 4년전 중고로 구매한 것인데, 잔고장이 잦은 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집 근처에 해당 회사의 서비스센터가 있어서 자주 방문한다. 그곳 직원은 모두 매우 친절한데, 특히 한 직원은 성실한 인상에 일도 열심히 하고 기술적으로도 많이 알고, 고객 입장에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내 차의 잦은 고장에는 짜증이 났지만, 친절한 그들의 서비스에는 늘 감동했다.
그날 발견한 고장은 2년전 증상과 동일한 고장이었다. 도난경보음이 오작동하는 것인데, 운행중 충격으로 인해 본네트의 간격이 벌어지면 그런 고장이 발생할 수 있고 그 간격만 정상적으로 조정하면 오작동은 사라진다,고 그 친절직원이 2년전에 설명해주었다. 나는 고장을 발견한 순간 그 원인을 진단하고 수리방법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불행의 씨앗은 간격을 조정할 줄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쉽게 수리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하고 서비스센터를 찾았다.
오후 3시쯤 방문했는데, 토요일이라 좁은 서비스 센터 안은 물론이고 주변 인도까지 서비스 대기 차량으로 꽉 찼고 전직원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세우고 접수담당 직원―40대 중반의 여성인데, 이 분도 한 친절 하신다―에게 차분히 내 차의 고장에서부터 그 원인과 해법까지(!) 설명해드렸다.
그 사이에도 구형 마티즈 한 대가 서비스센터로 들어왔고, 나는 일단 기다려 보라는 접수담당 직원의 말을 듣고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그 문제의(?) 친절직원이 열심히 도면을 보며 전화로 부품 주문을 하고 있었다. 원래 안면을 튼 사이였지만 그가 너무 바빠서 눈인사도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접수담당직원은 밖에서 차량을 대강 눈으로 살펴보고 들어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손님, 대기 차량이 너무 밀려서 지금은 주행과 관련된 고장이 아니면 수리가 좀 어려우십니다. 원래는 다섯시에 마감인데, 직원들이 모두 일해도 여섯시 넘게 끝날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다음주에 오시면 안 될까요?”
“안 되는데요,”
역시 암을 팔았다.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제가 다음 주초에 3차 항암주사를 맞습니다. 주사 맞고 일주일은 헤롱헤롱 하는데 그 기간에는 주로 마누라가 차를 쓰거든요. 근데, 마누라는 차를 잘 몰라서 당황할 것 같습니다.”
외래진료가 화요일로 예정되었다는 말은 일부러 생략했다. 월요일에 오라고 할까봐. ^^ 헤어스타일은 빠박이에다가 하늘색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으니 겉보기에 거짓말로 의심할 만한 정황은 없었다. 날짜를 하루 땡긴 것 빼고는 거짓이 아니기도 했고.
약간 당황한 접수 직원은 잠깐 밖으로 다시 나가 여기저기 작업지시를 하는 척하더니, 나를 다시 대기상태로 전환시키고 내 뒤에 온 마티즈 커플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 쪽은 정말 심각한 고장이었다. 브레이크 고장. 생명과 관련된 고장이므로 이쪽에 우선순위가 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커플은 내 얘기에 자극을 받았던 건지, 상황극도 연출하고 있었다:
“자기야, 나는 일단 여기서 일은 더 보고 있을 건데 일단 차 맡기고 혼자 집으로 가. 택시비는 얼마나 나올까? 한 3만원은 넘게 나올 것 같은데.”
여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쩌지? 자기 오늘 일도 늦게까지 할 거잖아. 그냥 내가 조금 기다려서 차량 수리하고 집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 아까 브레이크 안 들어도 어떻게든 좀 가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불안해서 안 되겠더라구.”
나도 안다. 그리고, 위기의식을 느꼈다. 여기서 물러서면 끝장이다. 지갑 속을 보니 병원 진료카드가 있었다. 접수담당 직원이 내게로 와서 다시 사정 설명을 시도하려는 찰나, 나는 그의 말의 앞을 자르며 암행어사 마패를 들었다:
“여기 보세요. 나 월요일에 항암주사 맞거든요. 그게 일종의 독극물인데, 그거 맞고 정신 못차리는 상황에서 마누라가 차 모는 걱정까지 하면 치료가 제대로 되겠어요?”
여기까지는 목소리 볼륨은 높아졌지만 차분한 어조는 유지했다. 다시 직원이 변명을 하려고 하길래 마무리로,
“아니, 이걸 못 고치긴 왜 못 고쳐? 이거 2년전에도 쉽게 고쳤는데. 아픈 사람 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나 지금 집에 갈 테니까 이거 그냥 고쳐놔!”
악보로 치면 crescendo. 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스스로 연주에 감탄하고 연주장을 빠져 나왔다. 소리를 지르는 동안에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표정관리가 됐는데, 나와서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겼지만 혹시 들킬까봐 꾹 참았다. 연주의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한 20m쯤 걸어서 마스크를 벗고 크게 웃었다. 암환자는 억지로라도 웃으라고 웃음치료하는 것처럼, 껄껄껄 웃었다. 큰 소리로!
집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었지만, 나는 예감했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너무 까불었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성격이 그지 같아서 암 걸렸어요.”
“아닙니다. 수리 다 됐습니다. 찾아 가세요.”
그 친절직원이었다. 이번에는 모자를 쓰고 방문했다. 여전히 고장 차량 수리에 전념하고 있는 친절직원에게 다가가 모자를 벗고 정중히 사과했다. 그 다음에는 사무실에 들어가 접수담당 직원에게 마찬가지로 사과했다.
“얼마죠?”
“그냥 가세요.”
2년전에 돈을 냈는지 안 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간단한 고장 수리는 가끔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는지 기억이 불분명하다. 어쩌면 해피콜―AS 만족도 전화조사, 바쁠 때 받으면 전혀 행복하지 않은 자기모순의 전화―이 안 가도록 아예 접수 자체를 안 했을 수도 있다―확인하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이번에도 판매 성공은 했다. 암 판매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나는 즐겁지만 어느 정도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위 두 사례는 이 점에 관해서 양 극단에 있는 사례이다. 이미 암에 걸려버린 사람은, 두 사례를 참고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암을 파시면 좋겠다. 이런 말씀 안 드려도 각자 일상에서 열심히 팔고 계시겠지만. : )
2011년 9월 3일 토요일
진짜 프로 낚시꾼이 요기 잉네?
이 블로그의 이름은 나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다. 꼭 나쁜 의미가 아니라,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하므로 그나마 내가 가진 재주 중에서 하나에 대해 ‘프로’가 되고 싶은 욕심을 반영한 이름이다.
그런데, 요즘 존경스러운 프로 낚시꾼의 부각에 새삼 놀라고 있다. 이 역시 비꼬는 의미가 아니라, 진심 그렇다. 또, 부럽다. 그 얘기를 잠깐 해보려고 한다.
그 존경스러운 분은 바로 이 분!
ⓒ 머니투데이 / 이기범 기자 / 2011. 09. 02
모두가 잘 아는 이 분이시다.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이미 대충 짐작하셨을 거다. 정말정말 우발적으로 치뤄지는 이번 선거에서 기존 정치인들은 어떻게 기회를 잡나 서로 눈치보고 있는 사이, 짠 하고 선빵을 날리시고 –다른 기성 정치인들이 선빵을 안 날린 것은 아니나, 그닥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는 사이– 연일 뉴스의 중심에 서 계시고 검색어 순위 상위권을 유지하고 계신 분이다.
이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생각해볼 만한 것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본다.
첫째, 안철수 개인과 관한 것이다. 그 동안 정치를 하네 마네 이런 얘기들이 주기적으로 등장할 때마다 참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허허실실 잘 넘기면서, 정부 정책에 관해 할 말은 다 해오셨다. 그러면서 또 한 자리도 하시고. ^^ 개인이 정치적인 야망을 갖는 것 자체는 도덕적인 선악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사실 진짜 도덕적으로 나쁜 놈들은 깜냥도 안 되는 것들이 나서는 것이다.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갖지 않고(내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결과만 놓고 유추했을 때), 그저 시류에 휩쓸려 혹은 돈 자랑하려고 등장했다 사라진 정치신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점에서 볼 때 마운드에 오를까 말까, 감독의 지시도 없이 불펜에서 팔 몇 번 흔들었을 뿐인데 상대방을 벌벌 떨게 하는 선동열 투수만큼 안철수도 매력이 철철 넘쳐 흐른다. 즉, 사람들이 안철수를 “진짜 좋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선거에서 바람이란 게 참 무서운 건데, 10월 26일까지 얼마 남지도 않은 시점에서 초반 거대한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미 그가 다른 후보군보다 세 수 내지 다섯 수는 앞서 가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 점은 결국 안철수가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래서 본 선거에서 기존 정치인들이 아무리 깎아내리고 흠집을 내려고 해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닐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게 한다.
둘째, 기존 정치판의 플레이어들에 관한 것이다. 한나라당, 민주당 모두. 사실 이번 사건은 기존 정당이 자초한 결과다. 그걸 알고 있나 잘 모르겠다. 그동안 서로 물밑에서 영입작전을 펴왔으면서도 “나 무소속 할래,” 한 마디에 각자 이해득실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옹졸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참 안쓰럽다.
사실 한나라당의 말이 정치공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선거에서 가장 첫번째 게임의 규칙은, 후보자 구도이다. 양자 구도이냐, 3자 구도, 혹은 그 이상의 구도이냐에 따라 결과가 극명하게 갈린다. 후보가 잘 나고 못 나고는 그 다음의 일이라는 것이다. 후보자의 수가 아니라, 정당의 수와 선거제도라는 변수를 적용해서 나온 이론이라 본 건 과는 약간 핀트가 다를 수 있지만, ‘듀베르제의 법칙’이라는 이론도 사실상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듀베르제의 법칙이 사회과학에서 ‘법칙’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이론이듯이, 선거판에서 제1의 게임의 규칙–후보자 구도가 선거결과를 결정한다–은 절대적이다.
쉽게 설명하면, 한나라당의 계산–안철수가 우리 표 말고 민주당 표 깎아먹는다–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적어도 기존의 정치공학적 계산에서는. 그런데, 여기서 그들의 한계가 있으며, 그 점 때문에 그들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도 반성도 못 하고 참 한심하다. 누구 말마따나,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아마 다음주초에 홍준표 대표가 최고위원회의에서 마구 질책을 할 것이다:
“누가 자꾸 안철수를 시장 후보로 영입하자고 해서 방방 띄워놨소? 그렇게 정체성 없이 표만 보고 휩쓸려 다니다가 우리가 이렇게 된 것 아니오?”
만약 월요일에 이런 기사가 뜬다면, 나를 무당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역시 홍준표는 남 핑계만 대는, 무책임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들은 정말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놓치고 있다.
그 점에서는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마치 영원히 야권의 ‘갑’ 노릇을 하겠다는 심뽀를 대놓고 드러내는 반응인데, 역시 매우 안타깝다. 그리고, 당내에서 선빵을 날린 천정배 의원이 불쌍하다. 이계안 이런 분은 말할 것도 없고. 한명숙은 여전히 뻔뻔하게 주판알 튕기고 있을지도 모르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 하기 약간 미안하지만, 박원순 변호사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그의 반응은 그래도 포털에 안철수 타이틀 옆에 혹은 아래 작은 글씨로 실어준다는 점에서, 기존 후보군보다 상대적으로 낫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역시 매우 슬픈 일이다. 공부만 잘 하는 샌님의 한계일 수도 있고, 최근 착한 일을 많이 했지만 덩달아 욕도 많이 먹은 탓에 한계가 아주아주 분명해 보인다. “쟤는 왜 갑툭튀 해가지고. ㅜㅠ” 이런 마음이겠지. 그냥 좋은 이미지 유지해줬으면 좋겠다.
이제 결론으로, 그럼 넌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니는 뭐가 잘 나서 이렇게 떠드느냐고 외치는 여러분께 한 말씀:
“난 말기 암환자요. 내일 모레 저 세상 갈 수도 있소. 10월 26일날 투표 못할 수도 있지롱. 헤헤.”
2011년 9월 2일 금요일
암은 선물입니다.
지난 주 토요일 오전, 병원에서 채혈 순서를 기다리는데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보낸 일명 ‘암 편지’를 읽고 전화를 한 것이었다.
“야, 나 좀 부럽다. 나도 그 암 걸리고 싶어. 정말 적당한 거 잘 걸렸는걸?”
끄덕끄덕.
“어떻게 나도 좀 걸릴 수 없나? 그거 전염되는 거 아니지? 나도 좀 나눠 줘.”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글쎄, 좀 힘들 것 같은데. 일단 내 종양조직을 채취해서 너에게 이식하면 될 것 같기도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첫째, 보험이 될까 모르겠고, 둘째, 내 암세포가 거의 사라졌거든. 원하는 조직 샘플을 얻기 힘들 거야.”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실화다. 아마 이 이야기만 처음 본 사람이라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이건 ‘암 편지’를 읽어봐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나는 그 편지를 아무에게나 공개할 마음이 없다. 만약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적어도 내 휴대전화 번호를 알고 있다면), 내게 문자 메시지로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길 바란다. ‘암 편지’를 바로 쏴드리겠다. 또한, 보안 유지를 부탁드린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이 블로그의 글을 꾸준히 읽다 보면, 내가 나누고 싶은 행복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일단 이 블로그의 시작은 돈 주고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행복’을 나누고자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