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4일 금요일 대통령 탄핵이 선고되고 바로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에 교대역 14번 출구 앞에서 YOON AGAIN 일파가 처음 모였다. 탄핵 찬성 집회에 두어 번 나간 경험은 있지만, 정치권 소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시기라 서부지법, 한남동의 겨울 상황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다지 정성 들여 관찰하지 않고 비난하기를 먼저 하였다. 한 마디로 그들을 이해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4월 5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동네를 거닐다 교대역 14번 출구 앞 도로에 모인 인파를 보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젊은 세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듣는 음악에(가사 내용은 매우 고개를 젓게 만들었지만)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동안 보수 집회에 대한 나의 편견은 이러했다: 나만사람(나이 많은 사람, 즉 '노인'의 경남 사투리)들의 잔치, 오후 4시 땡치면 해산하는 집회. 과거에도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한 적은 없지만 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분들은 집회에서 퇴장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4월 5일 내가 처음 내 두 눈으로 확인한 집단에 대하여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내가 먼저 밀려날 것이기 때문에 공포감이 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집회 참여자들이 굉장히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YOON AGAIN!", "STOP THE STEAL!" 팻말을 손에 들고 14번 출구에서 나왔다. '나만사람'들도 보였지만 소수였다. 그리고 나의 동년배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만약 내가 이날 본 젊은 세대가 이렇게 조직화되고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면? 아찔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집회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비를 맞으며 그들은 강남역까지 행진했다. 그들에게 전날은 끔찍했지만 이날만은 해방 공간을 만끽하며 기운을 모았다. 나는 무서웠다.
다음주도 비슷했다. 4월 12일 토요일에도 비가 내렸고 그들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날 난 그들을 제대로 쳐다 보지도 못 했다. 나라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부터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기사를 보기도 하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 찾아보고(책을 읽었다는 얘기는 아님), 공개 심포지엄을 신청했다. 이 모든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보는 쌓였으나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다가오는 대선 이후의 정국은 뻔히 예측되었다. 간단히 말해 정치의 '실종'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두 개의 진영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어느 하나의 진영이 승리한 이후 다른 한 진영이 불복하는 것 말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 문제가 하루이틀 된 것은 아니지만, 역사상 가장 극명하게 갈리고 더욱 골이 깊어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대선 결과가 나오고 거의 2주가 된 지금 나의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그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사실 이런 걱정을 내가 하고 있을 이유가 별로 없는데, 그냥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나서 잠이 오지 않았다.
대선 정국으로 접어들자 집회의 동력이 상실되는 것이 관찰되었다. 젊은 세대의 비중이 줄었고, 내가 편견으로 가지고 있던 과거 광화문 보수 단체의 집회와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안심할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명맥은 이어졌고 그들은 꾸준했다. 반면 현재 여권 세력의 집회는 그 세력이 약해 보였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일은 아니다. 어느 쪽도 진영간의 대화를 거부하고 세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필 세 대결의 장이 우리 동네라는 점이 짜증날 뿐이었다. 그래도 참을 만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한 번 정도는. 의식적으로라도 그 정도 참을성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게 맞는 방법인가? 나처럼 가방끈 길게 정치학을 '찍먹'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한나 아렌트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짐작 정도는 해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워낙 복잡하고 꼬여 있어서, 그리고 나도 문제가 뭔지 정확히 진단을 못 해서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답답했다. 5월의 어느 휴일, 교보문고 강남점에 아무런 목적 없이 방문했을 때, 마침 페이스북에서 이 책의 출판사 관계자인 선배가 올린 글을 보고 "모두를 위한 정치"(네드 오거먼 지음, 김창한 옮김, 마농지, 2025)를 접했다. 그 글을 보자마자 이 책을 충동구매했다.
트럼프 보유국인 미국에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에서 답을 찾았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양극화의 심화, 가짜 뉴스의 생산 등의 문제와 같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면이 많고,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책 전체의 내용이 아니라, "5장 왜 수사학이 필요한가"만 다루고 이후에 내가 이를 현실과 연결 지은 사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앞에 가방끈이 길다고 짧게 언급했지만, 그건 학위가 없는 컴플렉스가 있어 언급만 했을 뿐이고 실상은 등록금 낸 이력이 많을 뿐이다. 그래서 '전문 지식'이라고 자랑할 것도 아니고, 아렌트가 보기에 민주주의에서 필요한 덕목은 그것이 아니다. 동등하게 문제를 토론하고 논의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동등하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설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법에 의한 지배보다는 수사학적으로 지배하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수사학은 겸손한 행위다. 왜 저들은 이렇게 멍청한지 짜증내기보다는 그들을 이해시키지 못한 나의 문제로 돌려야 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동등하게 말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일종의 기술이 필요하면서도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를 보면 아렌트의 말이 한가하게 들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짜증나도 참고, 더욱 겸손한 자세로 상대방과 대화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이상과 너무 멀다. 게다가 활발한 정치적 의사 표현을 담보할 것처럼 보였던 기술은 정치적 양극화의 문제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한 책으로 캐스 선스타인이 쓴 2007년 저서 "republic.com 2.0"이 있다. 2008년쯤 지도교수님이 추천한 책으로 독서모임을 했던 기억이 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편집된 종이 신문과 비교할 때 Web 2.0 기술로 대변되는 개인 맞춤형 정보 제공 시스템은 결국 끼리끼리(the like-minded) 유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며 천국에 있는 한나 아렌트가 개탄할 일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이 나온 2007년에는 유튜브가 이제 막 대중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대중이 유튜브 콘텐츠 추천 알고리즘의 위험성을 체험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최근에 유행하는 스레드는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몰아가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republic.com 2.0"은 학술 도서라기보다는 거의 예언집에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기술의 발전이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했다.
다시 우리 동네 얘기로 돌아가보자. 대선의 결과가 나온 이후 첫번째로 윤석열의 공판이 열렸던 날 나는 약속 때문에 회사가 아닌 집 근처에 있었다. 그날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어디서 이런 공포스러운 소리가 나는 것인지. 그날은 토요일이 아닌 월요일이고, 이렇게 큰 소리의 출처를 짐작하지 못 했다. 골목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음향은 4월 5일 내가 느꼈던 공포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지?
다음날 새벽 잠은 안 오고 동네를 배회하다가 그 소리의 원천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농성장을 차린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사정을 알아보니 24시간 철야 집회이며 기한을 두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무척 화가 났다. 일주일에 한 번도 모자라서 매일 그 소음에 시달려야 한다니. 흥분된 마음에 쏘아붙이기도 했다. 결국 경찰이 출동하여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방식대로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겸손함과 거리가 먼 방식이었다. 뭐 나도 내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그들이 먼저 공격한 것이라고.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에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그들과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괴물'이 아니고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첫번째이다. 약 일주일간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관찰한 결과 그들이 우려스러운 정도는 아니다. 다만 아직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게 좀 답답한 일이다). 오히려 그들이 만들어낸 '정치 공동체'(서초구 법원로 10, 정곡빌딩 남관 앞 집회신고 장소)에는 목가적인 평화로움이 관찰되기도 한다.
물론 늘 조용한 것은 아니다.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의 시행령에서 허용하는 데시벨의 범위 안의 있더라도 음악 장르의 특성상 귀에 쏙쏙 박히면서 사람 미치게 만드는 음악이 있다. 게다가 가사도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래도 다름을 인정하려고 한다.
이 모든 판을 만든 기획자는 정치적 결사가 일어나고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는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고 있고, 서초구 법원로 10, 정곡빌딩 남관 앞에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을 차린 것으로 판단된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25년전 쯤에 경험한 현장활동과 유사성이 있다. 낮 동안 공동의 작업을 하면서 에너지를 소진하고 그 외 시간에는 반복되는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할 때 뭔가 음악이 몸에 흡수된다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최근 일주일간 나를 세뇌시킨, 짧은 가사에 반복되는 리듬을 가진 EDM은 계속 귓속을 맴도는 것이 '수능 금지곡'으로 지정될 만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대화한다. 소소한 주제부터 향후 정국까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더욱 많은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하기도 한다. 작은 채널이라도 스스로 운영해보려고 하고 서로 유튜브하는 것을 권하기도 한다. 역시 그들에게 일종의 '해방 공간'이 주어진 셈인데 이러한 공간을 계속적으로 제공하는 것(한 달 단위로 집회 신고 기간 만큼 연장. 그들이 대통령에 대한 고등법원 재판이 다시 열리는 날까지 집회를 하겠다고 천명했으므로 최소 5년)이 집시법의 입법 취지와 맞는 것인지는 다투어볼 만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조건은 그들의 주장을 제외하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주장 자체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들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그들이 의견을 형성하는 과정이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 아렌트가 말한 '설득'의 부재이다. 다른 진영에 소속되는 사람이라고 의심되는 사람이 대화 공간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설득'의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게다가 기술은 그 경향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유튜브는 말할 것도 없고, 스레드의 해시태그 방식은 그들을 자기 안으로 더욱 가둬두는 효과를 내고 있다. 그것을 '소통'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앞서 얘기했듯이 겉보기에 목가적인 평화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해방 공간'은 기술적, 문화적 제약 때문에 '설득'의 공간으로 발전하지 못 했다. 여기에 근원적 문제가 있다. 어쨌든 나는 계속 문을 두드리려고 한다.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으므로 미래를 속단하기 어렵다. 다음 번에는 대화의 '기술'에 대한 고민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