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2일 일요일

진짜 청년 정치.

요즘 일부러 정치 관련 콘텐츠를 멀리 하고 있다. 안 그래도 주변에 기 빨리는 일이 널리고 널렸는데, 굳이 소중한 나의 에너지를 소진하여 정치 콘텐츠를 '소비'하고 싶지 않다. 흔히 하는 말로,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또 너무 과잉이면서 진영 논리에 따라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라 그 질도 떨어진다. 정치적 효용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몇 년간 이른 바 '청년 정치'라는 이름으로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는데, 그들 하나하나 됨됨이를 평가할 실력은 안 되지만, 이제는 대체로 신선도도 떨어지고 차별화된 발언을 하거나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건 나만의 평가가 아닐 것이라고 보는데, 한 마디로 청년 정치인이 빠르게 기성 정치인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나이도 대체로 40대를 향해 가고 있으며,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생각도 같이 늙어가는 걸 보면, 원래 이들이 20대부터 어떤 뚜렷한 정치적 식견을 쌓아왔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그토록 공격하던 기성 정치인을 닮아가고 있다. 손호철 선생님이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거울 이미지'(선생님이 이 단어를 청년-기성 정치인의 관계에서 쓰지는 않으셨지만)인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단지 그 청년 정치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치의 비극이다. 특히 청년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는 것은 이후 정치권에 진입할 세대에게도 또한 한국 사회를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나는 현재 비난 받고 있는 이들이 스스로 변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대안으로는 현재 활동하는 '청년' 정치인들 중에서 미디어의 주목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으나,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는 '진짜' 청년 정치인을 발굴하고 그들을 응원하여 궁극적으로는 보다 큰 정치판(?)에서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을 실어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최근 우연한 자리에서 서울시 노원구의회 노연수 의원의 발언을 듣게 되었다. 몇 분 되지 않는 발언이었지만, 명확한 톤과 분명한 주장이 '물건'이라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했다. 원래 사람의 매력을 파악하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으며, 유권자는 정치인의 공약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한 표를 행사한다기보다는 정치인의 매력에 이끌려 한 표를 행사하는 경향이 강하다(전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나의 억지 주장임을 인정함).


그녀가 다음 선거에서는 구청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아직 모르고 있지만 이 시점에도 전국의 기초의회에 또 다른 '노연수'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청년 정치인의 등장을 응원해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유튜브, 팟캐스트 등에 넘쳐나는 정치 공해를 막고 진정으로 한국 정치를 한 발짝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한다.

2021년 8월 27일 금요일

인생 작전대로 되지 않는다.

몇 년 전부터 대학의 명강의를 대중에게 전하는 일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쉽게 동영상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인문학을 '소비'하는 트렌드도 한 몫을 했다고 본다. 뭐 이유나 목적이 어찌 됐든 좋은 강의를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다만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각에서 난 예전부터 '명강의'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마치 어떤 절대자로부터 대단한 진리를 일방적으로 제공받고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앞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원래 "삐딱이").

대안으로는 修業이란 단어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원래 쓰는 한자인 授業이 아닌, 修業이라 쓰면 뭔가 일방향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 수양을 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와서 일방향 대형 강의가 대부분이라는 현실에 뜨악하고(1학년 수업은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지만), 비싼 등록금 내고 그런 강의를 듣고 싶지 않아서 2학년때부터는 일부러 20명 내외의 소규모 修業만을 찾아 다녔다. 이 글에서는 기억을 더듬어 학부시절 修業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선정 기준은 딱히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정한 거다. 그만큼 기억에 남았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겠다.

1. 철학 전공 - 언어철학 (구자윤 선생님)

철학과 수업은 대부분 소규모 수업이지만, 그렇다고 항상 토론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선생님의 스타일에 따라, 또 해당 클래스를 구성하는 학생의 성향에 따라 수업의 분위기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구자윤 선생님은 편안하게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면서도 정확한 개념을 전달하는 데도 뛰어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학기의 커리큘럼은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언어철학이란 일상의 언어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철학에서의 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기에 확장해서 해석하는 일을 경계해야 하지만,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이론을 내 마음대로 해석해버렸다. 각자 인생의 궤적(가정 환경, 교육, 자기 성찰 등)이 서로 다르기에 각자가 구사하는 언어의 '맥락'은 어차피 서로 다르다. 따라서 타인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나의 언어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는 기대는 애초에 접어야 한다. 다만, 인간은 그 '맥락'에 주목함으로써 그에 가깝게 다가갈 수만 있을 뿐이다. 이 같은 '개똥철학'을 주입하면 타인의 말에 상처 받거나 나 혼자 열낼 일이 많이 없어진다. 그런 면에서 아주 실용적인 교훈을 준 셈이다.

2. 사학 전공 - 서양사 특강 (백인호 선생님)

내 기억엔 서양사 특강 뒤에 무슨 번호가 붙었던 것 같다. 번호를 붙이는 데 무슨 규칙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해당 수업은 한 학기 동안 프랑스 혁명을 다루었다. 흔히 프랑스 혁명을 공부한다고 하면, '테니스 코트의 선서'니 '삼부회'니 뭐 이런 것들을 줄줄이 외우고, 'ㄴ-ㄹ-ㄱ-ㄷ' 혹은 'ㄷ-ㄹ-ㄴ-ㄱ'인지를 고르는 것으로 '혁명-반혁명'의 과정을 깡그리 뭉개버리는 입시교육의 폐해를 떠올리기 쉽다. 백 선생님은 프랑스 혁명 전공자로서 방대한 지식을 갖고 계시지만 결코 일방적으로 전달하지는 않으셨다. 학생들이 대한민국 입시교육을 통과한 정도의 수준은 된다고 가정하고, 매번 영문 아티클을 읽고 학생들이 그 안에서 어떤 인사이트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한 학기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망딸리떼'였다. 영어로 치면, mentality 정도에 해당한다. 입시교육에서는 부르주아지나 왕족 혹은 귀족 출신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면, 이 수업에서는 당시 프랑스 민중(이 단어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이 공유하고 있던 '혁명의 기운'을 강조했다. 중간고사를 건너뛰고 유일한 평가였던 기말 과제는 프랑스 혁명의 어떤 시기를 선택하여 기층 민중을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 소설을 하나 쓰는 것이었다. 난 그닥 열심히 쓰지는 않았고 기한을 넘겨 억지로 제출했다(당연히 성적도 별로). 그럼에도 당시 내게 한 학기 수업 자체는 신선한 충격을 줬다. 프랑스 혁명뿐만 아니라, 현대사를 해석하는 관점을 기르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3. 정치학 전공 - 현대정치사상 (이동수 선생님)

우리 학교 정치사상 수업 이름은 항상 맨 뒤에 '史'자가 붙는데, 이 수업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아닌가? ㅎ 현대정치사상사, 라고 하니 좀 어색한 것 같아서 ^^;). 이 수업은 한 학기 내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다루었다. 이 수업을 듣기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내게 이해불가의 영역이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에 "신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책이 대단히 유행했는데, 아마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 컸다고 생각한다. 68혁명 때의 흑백사진을 오렌지색 톤으로 감싼 표지는 당시로서는 그 자체로 매우 '혁명적'이었다. 제목과 표지 때문에 잘 팔린 책이지 내용 때문에 유행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야지, 나만 이해하지 못한 걸로 생각하면 너무 억울함 ㅠ.ㅜ). 책의 두께에 주눅이 들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제대로 모르니 내용이 들어올리가 없었다. 다만 회색과 오렌지색이 조합된 표지가 패션 아이템으로 적절했을 뿐이었다.

이 수업의 첫날은 그야말로 내 인생의 "명강의"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이미지가 20년이 다 된 시점에도 아직 선명하다. 이 선생님은 칠판 가운데에 가로선을 하나 죽 그어놓고 맨 왼쪽에 선 위로는 '자연', 그 아래로는 '인간'이라고 쓴 다음, 맨 아래 가로축에는 각각 순서대로 '선사', '고대', '중세', '근대', '탈근대', 라고 적은 다음 한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썰을 확 푸셨다. 그리고 난 그 '강의' 하나로 그 간의 컴플렉스를 해결해버렸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렇게 쉽게 설명하고, 결국 깡통 같은 내가 이해해버리다니! 일방적 '강의'는 첫날만 있었다. 그 다음에는 되도록 책을 읽고 참여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리오타르 같은 것도 어색한 번역으로 나온 책이었지만 더듬더듬 이해하면서 참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만약 첫날의 그 "명강의"가 없었다면 그 기쁨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4. 중핵 필수 - 철학적 인간학 (스팔라틴 신부님)

졸업을 하려면 필수로 '그리스도 인간학' 또는 '철학적 인간학'을 들어야 했는데, 중핵 필수가 다 그렇듯이 내가 딱 싫어하는 대형강의 스타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1학년때 수강하지 않고 나중에 영어수업으로 개설될 때(그래서 10명 이하였던 걸로 기억, 폐강 위기였으나 어찌어찌 살아남) 듣게 되었다. 주교재로 여러 철학자를 다루는 영어 텍스트를 읽어야 했고 수업과 발표는 영어로 진행되었으나, 과제는 한글 책을 읽고 한글로 내도 무방했다(그래서 신청했다). 그 때 과제로 읽었던 책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같은 책이다. 이런 책을 억지로라도 감수성이 조금 살아 있을 때 읽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이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두 책이 한국에서 유명한 책이 아니었는데, 신부님 덕분에 '죽음'에 대해 미리 공부할 수 있었고 그것이 이후 암을 겪어내면서 '죽음'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하는 기회를 주었다(그렇다고 다시 읽지는 않았다).

5. 경제학 전공 - 미시경제학 (송의영 선생님)

마지막으로 쓸 수업은 아이러니하게도 '강의'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경제학 전공자는 (나같은 PEP 연계전공 나부랭이까지 포함하여) 필수로 들어야 하는 수업이고, 인기 있는 교수님의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과의 모든 분반이 동일하게 Varian의 Intermediate Microeconomics를 보고, 토론의 여지가 없이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과 습득만을 목표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송의영 선생님의 수업을 "명강의"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지 않고, "修業"으로 분류하고 싶다. 수강생이 100명 가까이 되었지만 말이다.

미시경제학 수업에서는 때때로 칠판 절반 정도를 쓸 정도로 공식 유도를 하여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 기억엔(선택적 기억일 수밖에 없지만), 송 선생님이 한 번에 깔끔하게 공식 유도를 끝까지 하신 적이 드물다. 유도하는 공식 중간의 어느 한 줄에서 작은 실수를 하여 결국 교과서에 나오는 공식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봤자 어려운 공식 유도도 아니고 기껏해야 편미분 정도하는 건데 실수가 나올 건덕지는 별로 없었다.

(여담: 미시경제학에서 편미분 한 번 써먹으려고 경제학 전공자는 필수로 교양 과목인 "대학수학"을 들어야 했다. 내가 졸업할 즈음에는 고등학교 문과 교육과정에서 미적분이 빠진다고 미적분을 모르는 학생들이 경제학과에 입학하면 세상 무너질 것처럼 김경환 교수님께서 한숨을 쉬셨다. 하지만 그 뒤로 10여년 동안 미적분도 모르는 신입생이 들어왔지만 별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같이 문송한 학생들에게 미분은 그저 x의 최고차항부터 줄 세우고 x의 지수에 해당하는 숫자를 x 앞에 계수로 빼고 차수를 하나씩 낮추는 단순작업일 뿐이지, 원리고 나발이고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편미분도 x나 y 중에서 한 놈만 패는 것이다.)

그렇게 실수를 할 때마다 교수님은 칠판에서 한 발 물러서면서 물끄러미 칠판에 적힌 수식들을 바라 보셨다. 그리고 이내 실수를 발견하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 마디 하셨다:

"인생 작전대로 되지 않아요."

이후로 이 말은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울대 학사에 하버드 박사이니 그보다 더 엘리트일 수는 없는 교수님께서 학부 수준의 공식 유도를 틀릴 리가 없다. 그렇다고 강의 준비를 게을리하는 교수님도 아니시다. 모든 것이 다 의도된 '작전'이며 '연기'가 아니었을까? 학생들에게 스티글리츠의 탈세모형 따위를 전달하는 것보다 딱딱한 경제학 강의에서도 인생의 '지혜'를 가르치고 싶어하셨던 것 같다.

인생 작전대로 되지 않는다.

2019년 3월 4일 월요일

잠시재潛時齋를 열며,

미치도록 쓰고 싶은 글이 있었다. 아이디어는 분명했고, 글을 거의 반쯤 완성했지만 컴퓨터를 바꾸면서 파일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 같다. 딴에는 의미 있는 글이라고 생각했지만, 난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쓸 데 없이 길고 재미없는 글이란 걸.

그래서 집착을 버리고 다시 시작한다. 영상도 함께. 그리고, 글은 짧고 분명하게.



일단 오늘은 올리는 게 목적이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려고 한다.

큰 기대는 없다. 그래도 시작했다.

2013년 3월 8일 금요일

나의 저질 체력.


2013년이 시작하자마자 무리를 좀 했다. 1월에는 계속 주말에도 일했고 2월에는 안 그러려고 했건만, 첫째 주 금/토/일 3일 연속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처음에는 가벼운 목감기 정도로 여기고 나의 호중구 기능을 테스트해본답시고 약도 안 먹고 버텼다. 일은 일대로 하고. –_-;;

역시 호중구가 멀쩡하지 않나 본지 설 연휴를  맞아 계속 골골대다가 결국 백기를 들고 이비인후과 신세를 일주일 넘게 졌다. 덕분에 이제는 다 나았고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가장 섬뜩한 건, 목에 무언가 느낌이 있을 때마다 혹시 종양? 뭐 요딴 걱정을 하는데, 그런 망상에 휘둘리는 거다. 물론 의사선생님이 아니라고 했다.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 능력도 많이 부족하다. 마음은 이것저것 다 하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준다. 어쩔 수 없다. 그냥 받아들여야지. 오히려 좋은 점이 있다. 원래 내 성격이 이것저것 마구 벌려놓고 수습 잘 못 하는 성격인데, 이제는 체력의 핸디캡 땜시 애시당초 (예전처럼) 막 저지르지는 않는다. 몸이 움직이기 전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나의 온 정신을 집중한다.

그렇게 잘 하면 얼마나 좋아. 에궁. ;;

2013년 2월 6일 수요일

직업적 편견.

 

유난히 좋지 않은 편견들을 가진 직업들이 있다. 예를 들어, 공무원, 택시 기사, 의사 등이 그러한데, 일상 생활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때때로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직업들이다. 그들에게 붙여진 ‘딱지’는 일종의 편견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정도다. ‘갑(甲)질’의' 왕 공무원, 불친절한 택시 기사, 오만한 의사 같은 것이 대표적인 편견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나는 위에서 언급한 스테레오 타입에 맞는 사람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내가 만난 공무원들은 모두 한결같이 똑똑하고 예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갑질’이랑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내가 ‘을’의 입장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다. 운이 좋은 건가?

택시 기사도 마찬가지다. 나는 정신이 없을 때나 기분이 울적할 때 빼고는 택시 기사와 대화를 즐기는 편이다. 그것도 택시비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기 땜시. –_-;; 뭐, 이런저런 쓸 데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거의 받아보질 못 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의사는 말할 것도 없다. 내 생명의 은인들이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경외한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만난 의사들은 모두 한결 같이 친절했으며 겸손했다. 때때로 그들이 하는 일에 비해서 돈을 조금 번다는,(ex. 레지던트) 쓰잘 데기 없는 연민의 정(?) 같은 걸 느끼기도 했다. 내가 너무 착한 건가?

왜?

물론 내가 긍정적이고 똘끼가 충만한 사람이라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경험이 ‘보편적’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문제는 ‘동감’이다. 더 나아가서 ‘연대’이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우리는 서로 같은 노동자라는 연대의식을 가질 때 세상은 더 아름다워진다. 어떤 직업적 캐릭터를 가지게 되든,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며 그 사연의 핵심은 우리는 모두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나와 같은 처지이다. ‘동감’하고 ‘연대’해야 한다.

※ 팁: KT 상담원이랑 통화 잘 하면, 아메리카노 커피 기프티콘 준다. ㅡㅡ;;

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지지이유가 분명한 한 표.

 

지난 대선 투표를 회고해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2007년 대선에서 누구를 찍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가카는 아니었고 정동영을 찍었을 리가 없는데, 그렇다고 권영길의 코리아연방 공화국을 지지하지도 않으니 찍지도 않았을 게다. 그리고 문국현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 얼굴 닮았다고 이회창? 이것도 아니고, 장난으로 허경영을 찍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설마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남은 건 사회당인데, 아마 여기를 찍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후보도 공약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전의 대선, 그러니까 2002년 대선은 분명히 기억난다(그래 봤자, 꼴랑 두 번^^). 민주노동당을 찍을까 사회당을  찍을까 계속 고민하다가 정몽준 지지 철회를 보고 노무현을 찍었다. 손이 저절로 그리로 가던데, 찍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낙장불입.

많은 암기법에서 강조하는 것이 암기할 대상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아무 이유 없이 관성적으로 표를 던졌고 그 결과 5년이 지난 시점에 지지 후보를 까먹었다. 반면, 10년 전의 선거에서는 스토리가 분명했으므로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나의 한 표는 선택지가 너무 뻔하기 때문에 기억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표를 던진 후보를 기억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의 지지 이유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네거티브 캠페인 만큼, 네거티브 지지(?) 역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단지 박근혜가 싫어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분명한 이유로 문재인을 지지한다:

1. 검찰 개혁을 ‘그나마’ 기대해 볼 만한 후보다. 다른 사람에겐 답이 없다. 특히 얼마 전 논란이 됐던 검사의 문자 메시지에서 알 수 있듯이,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다면 검찰 개혁은 물 건너 간다. 다시 과거의 되풀이가 될 수밖에 없다. 문재인 후보는 검찰 개혁에 대해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실패의 경험에 대해 솔직히 밝히고 있다(이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모든 일이 대통령 1인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할 때,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반드시 검찰 개혁이 될 것이라 순진하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2.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해결할 후보이다. 4대강 사업을 단순히 가카 개인의 잘못으로 치환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건 토건 욕망의 발현이고, 역대 정권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가카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겠다. 새만금 사업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이를 되돌리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정권의 연속성과 인적 구성의 문제가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도 4대강 사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할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어제 토론회에서도 그 점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갖지 않는다. 사실 누가 되든 대한민국이 크게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문재인 후보는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문제에서만큼은 박근혜 후보보다 분명한 강점이 있으므로 나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

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암을 대하는 나의 자세.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 암을 알게 되고 6차 항암 치료를 마친 것이 작년 이 맘때였다.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갔고, 몸도 마음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첫 항암을 할 때에는 마치 번지점프를 즐기는 심정과 같았다. 무슨 대단한 모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흥분된 상태였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항암 치료를 받았다. 큰 항암 부작용은 없었고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요추천자의 부작용으로 똑바로 서 있기만 하면 극심한 통증이 뇌에 가해진 적도 있었지만, 누워 있으면 멀쩡했으므로 바닥에 누워 낄낄거리며 여기저기 통화를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 마디로 항암 치료는 그 자체로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느끼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치료가 잘 되고 있고 완치 확률도 (암 치고는) 대단히 높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에는 복부에 종양이 가득 차 있었지만 3차 치료후 중간평가에서 거의 다 사라졌다.

Before and After

완전관해(CT상으로 종양소견이 없는 상태)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몸으로 느끼는 증상은 진단 이전에도 없었으므로 그냥 하던 대로 약만 견디고 나머지 3차 치료를 더 받으면 완전관해에 도달할 것이며 추가 치료는 없을 것으로 기대했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 사진은 무서워서 보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중간 평가 이후에는 그런 두려움도 사라지고 암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살았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 신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정점은 법인 설립이었다.

법인 설립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을 당시 나는 위에서 언급한 요추천자 부작용을 두 번이나 겪었다.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으나 온라인 재택 창업이 가능했기에 컴퓨터와 전화기만으로 덜컥 법인 설립을 해버렸다. 법인이 등록되고 법원 등기국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역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허리를 옆으로 기울이고(그렇게 하면 하나도 안 아팠다) 법원까지 운전을 해서 일을 봤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길에는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어서 법원 근처에 있는 선배의 사무실에서 뻗어버렸다. 마누라가 아들을 데리고 법원까지 찾아와서야 차를 되돌려 갈 수 있었다.

일의 진행도 순조로웠다. 같이 일을 진행했던 친구들과 호흡도 좋았고 기획도 나쁘진 않았다. 5차 치료 이후 구내염으로 1주일 정도 입원하고 체력이 많이 떨어져 일의 진행 속도가 더디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일은 계속 굴러가고 있었다. 호중구 회복이 더뎌 두 번이나 치료 일정이 연기되는 일도 있었지만, 마지막 6차 치료까지 끝내고 나서는 이제 더 이상 항암 치료는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신나게 일을 했다.

당시에 두 가지 기획이 동시에 진행중이었는데, 하나는 한 기초자치단체에 제안을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총선을 바라보고 후보자 캠프에 제안을 할 기획이었다. 운이 좋게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6차 치료를 마치고 3주 정도 흐르고 최종 평가를 위해 PET-CT를 찍고 그로부터 1주일 뒤 진료 예약이 잡혀 있었다. 12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정확한 날짜는 기억하기도 싫다). 담당 교수를 만나기로 한 바로 전날 그 기초자치단체장을 만났고 교수를 만난 이후에 바로 총선 관련 기획을 도와줄 선배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음.

“치료를 더 해야겠는데. 이식이란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할 수 있겠어요?”

질문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 배려한다는 의미였겠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는데 의향을 묻다니. 완전관해에는 이르지 못 했지만 그래도 90점 짜리는 되니 희망을 갖고 치료를 하자고 했다. 병실을 나오며 가장 먼저 한 일은 만날 약속을 했던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하는 일이었다.

사실 느낌은 좋지 못 했다. 6차 치료를 마치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자꾸 뱃속이 꿀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6차 치료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기에 꿀렁거리는 배를 붙잡고 일을 했다. 이제 자유다!

아, 그런데 이건.

치료를 받는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나는 그럭저럭 약을 잘 견디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진행해왔던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있나. 어떻게든 짱구를 굴려봤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미련을 버리는 수밖에.

자기조혈모세포이식이란, 주로 혈액암의 근본적인 치료를 목적으로 미리 환자 본인의 조혈모세포를 채집해두었다가 고용량 항암 이후에 다시 조혈모세포를 주입하여 생착시키는 것이다. 조혈모세포는 면역을 담당하는 혈액 성분을 만들어내는데, 고용량 항암 이후에는 이것이 사라지고 다시 재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완전 무균실에서 항암과 이식 치료를 하게 된다. 흔히 알고 있는 골수 이식과 같은 원리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골수에서 직접 조혈모세포를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 말초 혈액에서 마치 성분 헌혈하듯이 조혈모세포만 채집하게 되었다.

12월 20일경 조혈모세포 채집을 위해 다시 입원을 했다. 아빠의 입원을 응원하기 위해서인지 우리 아들도 입에 궤양이 생겨서 같은 날 응급실에 갔다가 입원을 하게 됐다. 채집을 위해서 일단 3일간 항암 주사를 맞았는데, 이로써 완전관해(에 가까운) 상태로 유도하고 이후 매일 두 차례씩 조혈모세포 촉진제를 맞았다.

주사를 맞고 호중구 수치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보통의 경우 2000개를 넘어야 정상이고 항암치료 중에는 1000개가 치료의 기준이 된다. 호중구 수치가 500개 이하로 떨어지면 일상생활에서 매우 엄격한 면역 관리가 필요하다. 그때 당시 나의 호중구는 50개 수준. 매일 두 차례씩 촉진제를 맞았으나 오르지 않고 계속 떨어졌다. 교수 말로는 열흘은 넘게 걸릴 거라고 했다. 게다가 일반 병실에 있었으므로 나는 아예 움직이지 않고 24시간 마스크를 쓰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크리스마스도 병실에서 보냈다. 감염 우려 때문에 성탄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호중구는 계속 떨어져 40개, 30개, 20개, 급기야는 2011년의 마지막날 10개를 찍었다. 10개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숫자다. 면역력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 그런데 나는 아직 일반 병동에 있고 스스로 관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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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게 나는 2012년 새해를 맞았다. 새해 첫날 그래도 나는 죽지를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같은 병실의 맞은 편 침대에 있던 환자가 폐렴에 걸려 중환자실에 간 것이다. 나는 멀쩡했다. 호중구 10개로 새해를 맞았지만 폐렴균은 나를 빗겨갔다. 물론 마스크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이걸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아, 죽지는 않는구나. 그때부터 서서히 수치가 오르기 시작하더니 1만개, 2만개까지 올랐다(말초혈액까지 조혈모세포가 많이 분포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까지 오르게 하려고 뽐뿌질을 한 것이다). 드디어 채집. 다행히 한 번에 끝났다.

퇴원을 하고 1주일의 여유가 있었다. 그 동안 주변 정리를 하고 이번에는 본격적인 이식 치료를 위해 설 연휴기간 직전에 다시 입원을 했다. 이번에는 완전무균실 병동. 요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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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들어가면 조혈모세포가 완전히 생착될 때까지 나올 수가 없다. 또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의료진은 커튼 바깥으로 장갑 구멍에 손을 넣어 치료를 하고 맞은 편 유리창을 통해 면회객의 얼굴을 보고 인터폰으로 통화하는 것이 전부였다.

비록 무균처리한 전화기와 아이패드, 책을 갖고 들어갔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약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무균실에 들어가자마자 5일 동안 약을 맞았는데, 이 약은 지금까지 맞았던 약에 비해 6~7배 강한, 말 그대로 고용량 항암 주사약이었다. 약이 들어가면 그냥 무기력해진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그 동안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음식을 거르거나 구토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무리 구토 방지제를 맞아도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결국 하루 만에 밥을 포기하고 미음만 먹었다. 그것도 겨우겨우. 나중에는 미음조차 먹지 못했다.

5일 동안 주사를 맞고 하루 쉬고 미리 얼려놓은 나의 조혈모세포를 넣는 날. 2012년 1월 27일. 나의 새로운 생일이라는데, 내가 그냥 다시 내 걸 넣어서 그런지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냥 한 고비 넘겼구나. 이제 좀 버틸 만 해질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도 없고, 또 무언가를 할 엄두도 안 나는 상황이었다.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흘렀다. TV를 보는 것도 힘들었다. 시간 되면 먹고 싸고 기록하고 감염 관리하고 그게 전부였다. 하루에 한 번씩 마누라가 면회를 왔지만 통화를 오래 할 힘도 없었다. 그리고 마누라가 떠나면 외로웠다. 그런데, 막상 다시 만나면 힘들어서 말하기도 귀찮은 상태가 되었다. 호중구 수치는 당연히 바닥을 쳤고 나의 몸과 마음은 바닥 아래로 떨어졌다.

애꿎은 간호사만 괴롭혔다. 아, 왜 이렇게 힘이 없나요. 잠깐만 나가보면 안 돼요? 이 정도면 잘 버티고 계신 거예요. 맞는 말인 것 같다. 무균실 창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신음 소리, 구토 소리, 각종 응급 상황들. 나는 너무 고요했다. 하루에 두 번 오는 레지던트와 한 번 오는 담당 교수. 그래요. 잘 버티고 있어요. 좀만 참아봐요.

참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그래도 한 가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항문의 통증이었다. 항암제는 몸 안의 모든 점막 세포를 파괴하는데, 항문에 제대로 염증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호중구가 0에 가까우므로 스스로 치유도 안 된다. 그리고, 치료 방법도 없다. 그저 좌욕과 연고를 바르는 수밖에. 자가면역력이 없어서 거의 도움이 안 된다. 의사도 어쩔 수 없댄다. 그냥 몰핀으로 견디는 수밖에. 근데, 너무 아팠다. 너무.

그래도 시간은 흘러 2주 정도 후에 완전 무균실을 탈출하고 준 무균실로 옮겼다. 그러니 조금 살 만 했다. 항문 통증만 빼면. 거기서 1주일 정도 더 회복하고 퇴원. 퇴원이 하루라도 늦춰질까봐 마지막 밤 잠잠했던 항문 통증이 도졌지만, 몰핀을 주문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정말 긴긴 밤이었다.

밖에 나오니 무지 추웠다. 근육에 힘도 없었지만 마냥 기분은 좋았다. 병원에서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 했는데, 나와서는 바로 밥 한 공기를 먹었다. 이식 치료후 생활은 매우 제약이 많다. 집안 환경을 항상 깨끗이 관리해야 하고, 먹는 것은 모두 끓여 먹어야 한다. 식기도 매 끼니마다 끓는 물에 소독을 한다. 나보다는 마누라가 힘들었다. 외출도 당연히 제약이 있고 집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아들을 되도록 멀리 해야 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누워만 있었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이제 해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다. 퇴원 후 처음 찍은 PET-CT의 판독지에는 이렇게 찍혀 있었다:

no significant change

뭐야. 원래는 3개월마다 한 번씩 찍는 CT를 바로 한 달 뒤에 찍게 됐다. 찔끔 줄었단다. 자라지는 않았으니 암은 아니고 종양의 흔적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제는 3개월마다 한 번씩 관찰하자고 했다.

이 때부터 극심한 우울증이 시작됐다. 3월초에는 이사도 했는데, 이사한 집도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울증이 심해질수록 나는 주변과의 연락을 아예 끊었다. 그리고 잠만 잤다. 매일 정오를 넘겨 일어났고, 오후 2시에 일어나도 또 자고 싶었다. 별로 살고 싶지도 않았지만 죽을 만한 의욕도 없었다.

마누라의 도움으로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일상생활의 제약도 하나 둘 풀려갔지만, 마음의 병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 잠만 자니까 체력도 좋지 못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30분을 걸으며 세 시간은 자야 했다. 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암이 완전히 사라진 건지도 모르겠고,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왜 작년에 법인은 만들었던 건지 짜증이 났다. 매출도 없는 회사의 세금 신고도 억지로 했다. 그리고 더 우울해졌다.

맨날 잠만 잤지만, 어떤 날은 아예 잠을 못 이루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특히 병원 가기 전 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죽음 자체는 별로 두렵지 않았는데, 죽는 과정이 너무 두려웠다. 재발을 한다고 해도 타인이식을 받으면 되기 때문에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과연 이 상태로 다시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매번 사진을 찍어도 흔적은 그대로였다. 그 놈만 없어지면, 사진만 깨끗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자꾸 마음을 먹기를, 3개월 뒤에 확실해지면 뭔가를 해야겠다는 쪽으로 결정을 뒤로 미루기만 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상태로 우울증의 나락에 빠져 여덟 달을 보냈다.

우울증 탈출을 위해 생각해낸 것이 집을 옮기는 것이었다. 이사한 곳은 예전에 생활하던 곳과 너무 멀고 아파트와 마트만 있는 재미 없는 동네였기에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10월초에 다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가 시작됐다.

이사 온 동네는 아파트지만, 주변에는 재미있는 골목이 많다. 홍제천과 불광천을 따라 걷다 보면 한강이 나온다. 난 매일 걸었다. 동네를 발견하는 재미에 걷다 보니 체력도 회복이 되고 허리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울증이 회복되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증거는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자꾸 3개월 뒤로 할 일을 미루지 말고, 주어진 3개월을 재미있게 살자. 3개월마다 갱신하는 삶을 살자.

다음 갱신일은 12월 17일이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재발을 할 수도 있고 흔적조차 깨끗하게 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오늘은 그냥 오늘 하루를 산다. 그래서 다시 열심히 살고 있다. 일도 다시 시작하고. 조만간 성과가 나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 없다. 그 자체로 이미 나의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이렇게 우울증의 터널을 빠져 나오고 나니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절망적이었는데 막상 빠져 나올 때는 아주 쉽게 빠져 나왔다. 역시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동안 옆에서 인내해준 가족에게 고맙다. 또 돌아오지 않는 연락을 해주었던 지인에게 미안하다.

암을 대하는 나의 자세도 변했다. 그냥 암 자체를 잊고 무시하면서 사는 게 제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머리로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살고 있다. 재발을 한다고 해도 타인이식치료를 받으면 그만이다. 단지 시간이 좀 더 많이 걸릴 뿐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꼭 타인이식치료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저 체력을 기르는 일이다. 어떻게든 길은 있기 마련이다.

어쨌든, 다 옛날 일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