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5일 월요일

암 팔기.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수많은 종류의 상품 중에서 M―C―M'의 마법을 부리는(?) 상품인 임금노동자의 ‘노동력’에 대해 서술한다. 이렇게 단순히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한 마디로 자기 몸뚱아리를 파는 거다.

내가 암환자로서 스스로 위축되는 때는 내 몸뚱아리를 팔 수 없다는 자각을 할 때이다. 특히 새벽마다 예전과는 달리 풀이 죽어 있는 내 동생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흔히 하는 말로 “가진 건 불알 두 쪽밖에 없었던 시절…”로 시작되는 수많은 자수성가 스토리는 내게 오히려 자괴감을 줄 뿐이다:

“뭐여, 이건 어따 팔 수도 없잖어.”

하지만 변강쇠는 팔 수 없지만 나만 팔 수 있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암이다. 물론 돈 받고 파는 것은 아니고, 결국 따지고 보면 내게 시간적/경제적 가끔 금전적(?) 이득을 안겨다 준다는 점에서 ‘판다’고 표현하려고 한다. 그 방법의 기본은 상대방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스스로 처량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나는 퇴원하고 처음 암을 팔아본 순간부터 그 재미를 느꼈고 이제는 ‘암 걸린 것도 억울한데 암이라도 열심히 팔아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다. 여기서는 그 첫경험과 최근 경험만 소개하고자 한다.

입원 당시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얼굴이 붓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안경테가 좀 휘었다. 퇴원하고 다음날 바로 예전에 안경을 맞췄던 안경점을 찾았다. 사장님과 직원 모두 친절한 곳이었고, 종종 들러서 소소한 얘기를 나눈 터라 서로 얼굴은 기억하고 있는 사이였다.

서로 기억하고 있는 모습에서 변한 것은, 나의 하늘색 마스크뿐이었다. 퇴원하고 감염예방에 특별히 신경을 쏟아야 하는 나는, 이왕 찾은 김에 안경 닦는 수건을 두 장 달라고 부탁하였다. 평소 친절했던 직원은 다소 쌀쌀 맞게,

“그건 공장에서 들어오는 물건이 많지 않아 한 장씩밖에 못 드려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때 나는 머리를 한 움큼 쑥 뽑으며,

“저 암환잔데요.”

“헉!”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손가락 셋을 펴 보이며,

“세 장 주세요.”

“아, 네.”

이게 나의 첫경험이다. 머리 뽑는 스킬은 그 다음날 삭발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암을 팔아보니 나름 쏠쏠한 재미가 있고 그 방법도 무궁무진했다. ^^;

가장 최근 경험은 지난 토요일의 경험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웃기는 상황이고 참 내가 많이 뻔뻔해졌구나,라고 느꼈던 일이다. 내 차는 4년전 중고로 구매한 것인데, 잔고장이 잦은 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집 근처에 해당 회사의 서비스센터가 있어서 자주 방문한다. 그곳 직원은 모두 매우 친절한데, 특히 한 직원은 성실한 인상에 일도 열심히 하고 기술적으로도 많이 알고, 고객 입장에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내 차의 잦은 고장에는 짜증이 났지만, 친절한 그들의 서비스에는 늘 감동했다.

그날 발견한 고장은 2년전 증상과 동일한 고장이었다. 도난경보음이 오작동하는 것인데, 운행중 충격으로 인해 본네트의 간격이 벌어지면 그런 고장이 발생할 수 있고 그 간격만 정상적으로 조정하면 오작동은 사라진다,고 그 친절직원이 2년전에 설명해주었다. 나는 고장을 발견한 순간 그 원인을 진단하고 수리방법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불행의 씨앗은 간격을 조정할 줄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쉽게 수리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하고 서비스센터를 찾았다.

오후 3시쯤 방문했는데, 토요일이라 좁은 서비스 센터 안은 물론이고 주변 인도까지 서비스 대기 차량으로 꽉 찼고 전직원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세우고 접수담당 직원―40대 중반의 여성인데, 이 분도 한 친절 하신다―에게 차분히 내 차의 고장에서부터 그 원인과 해법까지(!) 설명해드렸다.

그 사이에도 구형 마티즈 한 대가 서비스센터로 들어왔고, 나는 일단 기다려 보라는 접수담당 직원의 말을 듣고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그 문제의(?) 친절직원이 열심히 도면을 보며 전화로 부품 주문을 하고 있었다. 원래 안면을 튼 사이였지만 그가 너무 바빠서 눈인사도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접수담당직원은 밖에서 차량을 대강 눈으로 살펴보고 들어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손님, 대기 차량이 너무 밀려서 지금은 주행과 관련된 고장이 아니면 수리가 좀 어려우십니다. 원래는 다섯시에 마감인데, 직원들이 모두 일해도 여섯시 넘게 끝날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다음주에 오시면 안 될까요?”

“안 되는데요,”

역시 암을 팔았다.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제가 다음 주초에 3차 항암주사를 맞습니다. 주사 맞고 일주일은 헤롱헤롱 하는데 그 기간에는 주로 마누라가 차를 쓰거든요. 근데, 마누라는 차를 잘 몰라서 당황할 것 같습니다.”

외래진료가 화요일로 예정되었다는 말은 일부러 생략했다. 월요일에 오라고 할까봐. ^^ 헤어스타일은 빠박이에다가 하늘색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으니 겉보기에 거짓말로 의심할 만한 정황은 없었다. 날짜를 하루 땡긴 것 빼고는 거짓이 아니기도 했고.

약간 당황한 접수 직원은 잠깐 밖으로 다시 나가 여기저기 작업지시를 하는 척하더니, 나를 다시 대기상태로 전환시키고 내 뒤에 온 마티즈 커플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 쪽은 정말 심각한 고장이었다. 브레이크 고장. 생명과 관련된 고장이므로 이쪽에 우선순위가 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커플은 내 얘기에 자극을 받았던 건지, 상황극도 연출하고 있었다:

“자기야, 나는 일단 여기서 일은 더 보고 있을 건데 일단 차 맡기고 혼자 집으로 가. 택시비는 얼마나 나올까? 한 3만원은 넘게 나올 것 같은데.”

여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쩌지? 자기 오늘 일도 늦게까지 할 거잖아. 그냥 내가 조금 기다려서 차량 수리하고 집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 아까 브레이크 안 들어도 어떻게든 좀 가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불안해서 안 되겠더라구.”

나도 안다. 그리고, 위기의식을 느꼈다. 여기서 물러서면 끝장이다. 지갑 속을 보니 병원 진료카드가 있었다. 접수담당 직원이 내게로 와서 다시 사정 설명을 시도하려는 찰나, 나는 그의 말의 앞을 자르며 암행어사 마패를 들었다:

“여기 보세요. 나 월요일에 항암주사 맞거든요. 그게 일종의 독극물인데, 그거 맞고 정신 못차리는 상황에서 마누라가 차 모는 걱정까지 하면 치료가 제대로 되겠어요?”

여기까지는 목소리 볼륨은 높아졌지만 차분한 어조는 유지했다. 다시 직원이 변명을 하려고 하길래 마무리로,

“아니, 이걸 못 고치긴 왜 못 고쳐? 이거 2년전에도 쉽게 고쳤는데. 아픈 사람 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나 지금 집에 갈 테니까 이거 그냥 고쳐놔!”

악보로 치면 crescendo. 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스스로 연주에 감탄하고 연주장을 빠져 나왔다. 소리를 지르는 동안에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표정관리가 됐는데, 나와서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겼지만 혹시 들킬까봐 꾹 참았다. 연주의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한 20m쯤 걸어서 마스크를 벗고 크게 웃었다. 암환자는 억지로라도 웃으라고 웃음치료하는 것처럼, 껄껄껄 웃었다. 큰 소리로!

집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었지만, 나는 예감했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너무 까불었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성격이 그지 같아서 암 걸렸어요.”

“아닙니다. 수리 다 됐습니다. 찾아 가세요.”

그 친절직원이었다. 이번에는 모자를 쓰고 방문했다. 여전히 고장 차량 수리에 전념하고 있는 친절직원에게 다가가 모자를 벗고 정중히 사과했다. 그 다음에는 사무실에 들어가 접수담당 직원에게 마찬가지로 사과했다.

“얼마죠?”

“그냥 가세요.”

2년전에 돈을 냈는지 안 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간단한 고장 수리는 가끔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는지 기억이 불분명하다. 어쩌면 해피콜―AS 만족도 전화조사, 바쁠 때 받으면 전혀 행복하지 않은 자기모순의 전화―이 안 가도록 아예 접수 자체를 안 했을 수도 있다―확인하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이번에도 판매 성공은 했다. 암 판매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나는 즐겁지만 어느 정도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위 두 사례는 이 점에 관해서 양 극단에 있는 사례이다. 이미 암에 걸려버린 사람은, 두 사례를 참고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암을 파시면 좋겠다. 이런 말씀 안 드려도 각자 일상에서 열심히 팔고 계시겠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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