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암을 대하는 나의 자세.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 암을 알게 되고 6차 항암 치료를 마친 것이 작년 이 맘때였다.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갔고, 몸도 마음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첫 항암을 할 때에는 마치 번지점프를 즐기는 심정과 같았다. 무슨 대단한 모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흥분된 상태였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항암 치료를 받았다. 큰 항암 부작용은 없었고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요추천자의 부작용으로 똑바로 서 있기만 하면 극심한 통증이 뇌에 가해진 적도 있었지만, 누워 있으면 멀쩡했으므로 바닥에 누워 낄낄거리며 여기저기 통화를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 마디로 항암 치료는 그 자체로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느끼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치료가 잘 되고 있고 완치 확률도 (암 치고는) 대단히 높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에는 복부에 종양이 가득 차 있었지만 3차 치료후 중간평가에서 거의 다 사라졌다.

Before and After

완전관해(CT상으로 종양소견이 없는 상태)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몸으로 느끼는 증상은 진단 이전에도 없었으므로 그냥 하던 대로 약만 견디고 나머지 3차 치료를 더 받으면 완전관해에 도달할 것이며 추가 치료는 없을 것으로 기대했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 사진은 무서워서 보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중간 평가 이후에는 그런 두려움도 사라지고 암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살았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 신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정점은 법인 설립이었다.

법인 설립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을 당시 나는 위에서 언급한 요추천자 부작용을 두 번이나 겪었다.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으나 온라인 재택 창업이 가능했기에 컴퓨터와 전화기만으로 덜컥 법인 설립을 해버렸다. 법인이 등록되고 법원 등기국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역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허리를 옆으로 기울이고(그렇게 하면 하나도 안 아팠다) 법원까지 운전을 해서 일을 봤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길에는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어서 법원 근처에 있는 선배의 사무실에서 뻗어버렸다. 마누라가 아들을 데리고 법원까지 찾아와서야 차를 되돌려 갈 수 있었다.

일의 진행도 순조로웠다. 같이 일을 진행했던 친구들과 호흡도 좋았고 기획도 나쁘진 않았다. 5차 치료 이후 구내염으로 1주일 정도 입원하고 체력이 많이 떨어져 일의 진행 속도가 더디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일은 계속 굴러가고 있었다. 호중구 회복이 더뎌 두 번이나 치료 일정이 연기되는 일도 있었지만, 마지막 6차 치료까지 끝내고 나서는 이제 더 이상 항암 치료는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신나게 일을 했다.

당시에 두 가지 기획이 동시에 진행중이었는데, 하나는 한 기초자치단체에 제안을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총선을 바라보고 후보자 캠프에 제안을 할 기획이었다. 운이 좋게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6차 치료를 마치고 3주 정도 흐르고 최종 평가를 위해 PET-CT를 찍고 그로부터 1주일 뒤 진료 예약이 잡혀 있었다. 12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정확한 날짜는 기억하기도 싫다). 담당 교수를 만나기로 한 바로 전날 그 기초자치단체장을 만났고 교수를 만난 이후에 바로 총선 관련 기획을 도와줄 선배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음.

“치료를 더 해야겠는데. 이식이란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할 수 있겠어요?”

질문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 배려한다는 의미였겠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는데 의향을 묻다니. 완전관해에는 이르지 못 했지만 그래도 90점 짜리는 되니 희망을 갖고 치료를 하자고 했다. 병실을 나오며 가장 먼저 한 일은 만날 약속을 했던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하는 일이었다.

사실 느낌은 좋지 못 했다. 6차 치료를 마치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자꾸 뱃속이 꿀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6차 치료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기에 꿀렁거리는 배를 붙잡고 일을 했다. 이제 자유다!

아, 그런데 이건.

치료를 받는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나는 그럭저럭 약을 잘 견디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진행해왔던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있나. 어떻게든 짱구를 굴려봤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미련을 버리는 수밖에.

자기조혈모세포이식이란, 주로 혈액암의 근본적인 치료를 목적으로 미리 환자 본인의 조혈모세포를 채집해두었다가 고용량 항암 이후에 다시 조혈모세포를 주입하여 생착시키는 것이다. 조혈모세포는 면역을 담당하는 혈액 성분을 만들어내는데, 고용량 항암 이후에는 이것이 사라지고 다시 재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완전 무균실에서 항암과 이식 치료를 하게 된다. 흔히 알고 있는 골수 이식과 같은 원리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골수에서 직접 조혈모세포를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 말초 혈액에서 마치 성분 헌혈하듯이 조혈모세포만 채집하게 되었다.

12월 20일경 조혈모세포 채집을 위해 다시 입원을 했다. 아빠의 입원을 응원하기 위해서인지 우리 아들도 입에 궤양이 생겨서 같은 날 응급실에 갔다가 입원을 하게 됐다. 채집을 위해서 일단 3일간 항암 주사를 맞았는데, 이로써 완전관해(에 가까운) 상태로 유도하고 이후 매일 두 차례씩 조혈모세포 촉진제를 맞았다.

주사를 맞고 호중구 수치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보통의 경우 2000개를 넘어야 정상이고 항암치료 중에는 1000개가 치료의 기준이 된다. 호중구 수치가 500개 이하로 떨어지면 일상생활에서 매우 엄격한 면역 관리가 필요하다. 그때 당시 나의 호중구는 50개 수준. 매일 두 차례씩 촉진제를 맞았으나 오르지 않고 계속 떨어졌다. 교수 말로는 열흘은 넘게 걸릴 거라고 했다. 게다가 일반 병실에 있었으므로 나는 아예 움직이지 않고 24시간 마스크를 쓰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크리스마스도 병실에서 보냈다. 감염 우려 때문에 성탄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호중구는 계속 떨어져 40개, 30개, 20개, 급기야는 2011년의 마지막날 10개를 찍었다. 10개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숫자다. 면역력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 그런데 나는 아직 일반 병동에 있고 스스로 관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2012-11-26 05.59.24

렇게 나는 2012년 새해를 맞았다. 새해 첫날 그래도 나는 죽지를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같은 병실의 맞은 편 침대에 있던 환자가 폐렴에 걸려 중환자실에 간 것이다. 나는 멀쩡했다. 호중구 10개로 새해를 맞았지만 폐렴균은 나를 빗겨갔다. 물론 마스크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이걸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아, 죽지는 않는구나. 그때부터 서서히 수치가 오르기 시작하더니 1만개, 2만개까지 올랐다(말초혈액까지 조혈모세포가 많이 분포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까지 오르게 하려고 뽐뿌질을 한 것이다). 드디어 채집. 다행히 한 번에 끝났다.

퇴원을 하고 1주일의 여유가 있었다. 그 동안 주변 정리를 하고 이번에는 본격적인 이식 치료를 위해 설 연휴기간 직전에 다시 입원을 했다. 이번에는 완전무균실 병동. 요렇게 생겼다.

IMG_20120121_171252IMG_20120121_171306

한 번 들어가면 조혈모세포가 완전히 생착될 때까지 나올 수가 없다. 또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의료진은 커튼 바깥으로 장갑 구멍에 손을 넣어 치료를 하고 맞은 편 유리창을 통해 면회객의 얼굴을 보고 인터폰으로 통화하는 것이 전부였다.

비록 무균처리한 전화기와 아이패드, 책을 갖고 들어갔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약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무균실에 들어가자마자 5일 동안 약을 맞았는데, 이 약은 지금까지 맞았던 약에 비해 6~7배 강한, 말 그대로 고용량 항암 주사약이었다. 약이 들어가면 그냥 무기력해진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그 동안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음식을 거르거나 구토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무리 구토 방지제를 맞아도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결국 하루 만에 밥을 포기하고 미음만 먹었다. 그것도 겨우겨우. 나중에는 미음조차 먹지 못했다.

5일 동안 주사를 맞고 하루 쉬고 미리 얼려놓은 나의 조혈모세포를 넣는 날. 2012년 1월 27일. 나의 새로운 생일이라는데, 내가 그냥 다시 내 걸 넣어서 그런지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냥 한 고비 넘겼구나. 이제 좀 버틸 만 해질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도 없고, 또 무언가를 할 엄두도 안 나는 상황이었다.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흘렀다. TV를 보는 것도 힘들었다. 시간 되면 먹고 싸고 기록하고 감염 관리하고 그게 전부였다. 하루에 한 번씩 마누라가 면회를 왔지만 통화를 오래 할 힘도 없었다. 그리고 마누라가 떠나면 외로웠다. 그런데, 막상 다시 만나면 힘들어서 말하기도 귀찮은 상태가 되었다. 호중구 수치는 당연히 바닥을 쳤고 나의 몸과 마음은 바닥 아래로 떨어졌다.

애꿎은 간호사만 괴롭혔다. 아, 왜 이렇게 힘이 없나요. 잠깐만 나가보면 안 돼요? 이 정도면 잘 버티고 계신 거예요. 맞는 말인 것 같다. 무균실 창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신음 소리, 구토 소리, 각종 응급 상황들. 나는 너무 고요했다. 하루에 두 번 오는 레지던트와 한 번 오는 담당 교수. 그래요. 잘 버티고 있어요. 좀만 참아봐요.

참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그래도 한 가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항문의 통증이었다. 항암제는 몸 안의 모든 점막 세포를 파괴하는데, 항문에 제대로 염증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호중구가 0에 가까우므로 스스로 치유도 안 된다. 그리고, 치료 방법도 없다. 그저 좌욕과 연고를 바르는 수밖에. 자가면역력이 없어서 거의 도움이 안 된다. 의사도 어쩔 수 없댄다. 그냥 몰핀으로 견디는 수밖에. 근데, 너무 아팠다. 너무.

그래도 시간은 흘러 2주 정도 후에 완전 무균실을 탈출하고 준 무균실로 옮겼다. 그러니 조금 살 만 했다. 항문 통증만 빼면. 거기서 1주일 정도 더 회복하고 퇴원. 퇴원이 하루라도 늦춰질까봐 마지막 밤 잠잠했던 항문 통증이 도졌지만, 몰핀을 주문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정말 긴긴 밤이었다.

밖에 나오니 무지 추웠다. 근육에 힘도 없었지만 마냥 기분은 좋았다. 병원에서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 했는데, 나와서는 바로 밥 한 공기를 먹었다. 이식 치료후 생활은 매우 제약이 많다. 집안 환경을 항상 깨끗이 관리해야 하고, 먹는 것은 모두 끓여 먹어야 한다. 식기도 매 끼니마다 끓는 물에 소독을 한다. 나보다는 마누라가 힘들었다. 외출도 당연히 제약이 있고 집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아들을 되도록 멀리 해야 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누워만 있었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이제 해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다. 퇴원 후 처음 찍은 PET-CT의 판독지에는 이렇게 찍혀 있었다:

no significant change

뭐야. 원래는 3개월마다 한 번씩 찍는 CT를 바로 한 달 뒤에 찍게 됐다. 찔끔 줄었단다. 자라지는 않았으니 암은 아니고 종양의 흔적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제는 3개월마다 한 번씩 관찰하자고 했다.

이 때부터 극심한 우울증이 시작됐다. 3월초에는 이사도 했는데, 이사한 집도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울증이 심해질수록 나는 주변과의 연락을 아예 끊었다. 그리고 잠만 잤다. 매일 정오를 넘겨 일어났고, 오후 2시에 일어나도 또 자고 싶었다. 별로 살고 싶지도 않았지만 죽을 만한 의욕도 없었다.

마누라의 도움으로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일상생활의 제약도 하나 둘 풀려갔지만, 마음의 병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 잠만 자니까 체력도 좋지 못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30분을 걸으며 세 시간은 자야 했다. 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암이 완전히 사라진 건지도 모르겠고,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왜 작년에 법인은 만들었던 건지 짜증이 났다. 매출도 없는 회사의 세금 신고도 억지로 했다. 그리고 더 우울해졌다.

맨날 잠만 잤지만, 어떤 날은 아예 잠을 못 이루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특히 병원 가기 전 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죽음 자체는 별로 두렵지 않았는데, 죽는 과정이 너무 두려웠다. 재발을 한다고 해도 타인이식을 받으면 되기 때문에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과연 이 상태로 다시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매번 사진을 찍어도 흔적은 그대로였다. 그 놈만 없어지면, 사진만 깨끗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자꾸 마음을 먹기를, 3개월 뒤에 확실해지면 뭔가를 해야겠다는 쪽으로 결정을 뒤로 미루기만 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상태로 우울증의 나락에 빠져 여덟 달을 보냈다.

우울증 탈출을 위해 생각해낸 것이 집을 옮기는 것이었다. 이사한 곳은 예전에 생활하던 곳과 너무 멀고 아파트와 마트만 있는 재미 없는 동네였기에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10월초에 다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가 시작됐다.

이사 온 동네는 아파트지만, 주변에는 재미있는 골목이 많다. 홍제천과 불광천을 따라 걷다 보면 한강이 나온다. 난 매일 걸었다. 동네를 발견하는 재미에 걷다 보니 체력도 회복이 되고 허리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울증이 회복되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증거는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자꾸 3개월 뒤로 할 일을 미루지 말고, 주어진 3개월을 재미있게 살자. 3개월마다 갱신하는 삶을 살자.

다음 갱신일은 12월 17일이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재발을 할 수도 있고 흔적조차 깨끗하게 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오늘은 그냥 오늘 하루를 산다. 그래서 다시 열심히 살고 있다. 일도 다시 시작하고. 조만간 성과가 나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 없다. 그 자체로 이미 나의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이렇게 우울증의 터널을 빠져 나오고 나니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절망적이었는데 막상 빠져 나올 때는 아주 쉽게 빠져 나왔다. 역시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동안 옆에서 인내해준 가족에게 고맙다. 또 돌아오지 않는 연락을 해주었던 지인에게 미안하다.

암을 대하는 나의 자세도 변했다. 그냥 암 자체를 잊고 무시하면서 사는 게 제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머리로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살고 있다. 재발을 한다고 해도 타인이식치료를 받으면 그만이다. 단지 시간이 좀 더 많이 걸릴 뿐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꼭 타인이식치료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저 체력을 기르는 일이다. 어떻게든 길은 있기 마련이다.

어쨌든, 다 옛날 일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댓글 5개:

  1. 사업등록증에 "출판" 추가하고, 자서전 출간 준비하자~

    답글삭제
  2. 형 멋져요^^ 저의 아팠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답글삭제
  3. 어린이 위인전 김용히 -아픈 편-이 끝나서 다행임! ^..^

    답글삭제
  4. 오빠~ 작년 이맘 때 쯤 소식 듣고 놀라서 페이스북 메세지 보냈었는데, 그동안 많이 좋아진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빨리 완쾌할 수 있도록 기도할게요!

    답글삭제
  5. 삼촌, 진욱입니다. 카톡보고 들어왔어요 ^^
    대략적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거 뉴스인터뷰에서..ㅎㅎ
    역시 훌륭하게 이겨내고 계시군요.
    지난 시간이 제가 사실 짐작조차 할수없는 그런 과정이었겠지만,
    그래도 멀리서나마 건강하시기를, 회복하시기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면 금방 건강해지실 겁니다.
    마음이 건강하면 표정이 건강해지고, 곧 신체가 건강해진다고 하잖아요.
    글을 쭉 보니까, 왠지 저희동네로 이사오신거 같은데 (명지대근처)
    몸좀 괜찮아지시면 연락주세요, 제 와이프 소개도 못시켜드린거 같은데.
    다음에 또 들르겠습니다. 파이팅 하세요! ㅎㅎ

    답글삭제